00000nz a2200000n 4500 001 KSH2001009990 005 20171226102436 008 010506 n azknn|abn |a a|a | 151 ▼a요(국명)[遼]▲ 451 ▼a거란[契丹]▲ 451 ▼a요나라[遼--]▲ 550 ▼wg▼a중국 왕조[中國王朝]▲ 550 ▼wh▼a남경 석진부[南京析津府]▲ 550 ▼wh▼a동경 요양부[東京遼陽府]▲ 550 ▼wh▼a상경 임황부[上京臨潢府]▲ 550 ▼wh▼a서경 대동부[西京大同府]▲ 550 ▼wh▼a중경 대정부[中京大定府]▲ 550 ▼a강동 6주[江東六州]▲ 550 ▼a거란 문자[契丹文字]▲ 550 ▼a거란 침입[契丹侵入]▲ 550 ▼a거란군[契丹軍]▲ 550 ▼a거란족[契丹族]▲ 550 ▼a광군[光軍]▲ 550 ▼a연운 16주[燕雲十六州]▲ 550 ▼a요 연호(연호)[遼年號]▲ 550 ▼a요 왕조[遼王朝]▲ 551 ▼a고려(국명)[高麗]▲ 551 ▼a금(국명)[金]▲ 551 ▼a정안국(국명)[定安國]▲ 680 ▼i거란족이 세운 중국의 왕조(916~1125). 처음에는 거란이란 국호를 사용했으나 2대 태종 때 요(遼)로 바꾸었다. 정복왕조의 하나이다. 창시자는 동호계(東胡系) 유목민인 거란족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이다. 거란족은 4세기 이후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 시라무렌강(江) 유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다가 6~9세기경, 수(隋) ·당(唐)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발전하였는데, 9세기 말 당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점차 발흥(勃興)하였다. 질라부(迭刺部)의 실력자 가문에서 태어난 야율아보기는 무공을 세워 기반을 구축하고 이주시킨 한인(韓人)의 협력을 얻어 거란제부(契丹諸部)의 통합에 성공하여, 군장(君長)이 되었다가 916년에 즉위하여 중국식으로 황제라 칭하고 본거지였던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遼寧省 巴林左旗)에 도읍을 정하였다. 그가 곧 요의 태조(太祖)이다. 태조시대에 서쪽으로는 탕구트 ·위구르 등 제부족을 제압하여, 외몽골에서 동투르키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확보하였고, 동쪽으로는 발해(渤海)를 멸망시켜 만주지역 전역을 장악하였다. 제2대 태종(太宗)은 중국 경략에 힘써, 후당(後唐)의 장군 석경당(石敬)을 도와 후진(後晉)을 세우게 하였고, 그 보상으로 만리장성 이남의 연운16주(燕雲十六州)를 할양받아 국호를 요라 하였다(946). 태종은 만리장성 이남으로 진출하여 후진을 멸망시키고, 대량(大梁:河南省 開封)으로 진출하였으나 한지(漢地) 지배에 실패하고 철수하였다. 제3대 세종(世宗), 제4대 목종(穆宗), 제5대 경종(景宗) 때에는 제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이 계속되어 남방진출은 어려웠으나, 제6대 성종(聖宗), 제7대 흥종(興宗), 제8대 도종(道宗)의 3대 약 100년간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특히 성종 때 가장 강성해져서 성종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송(宋)을 공격하여 1004년 유리한 조건으로 송과 화의를 맺었다(淵의 盟約). 이후 요는 송으로부터 획득한 세폐(歲幣)로 재정이 풍요해졌고, 송과의 무역에 의해 경제 ·문화상 많은 발전을 보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