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0nz a2200000n 4500 001 KSH2004043353 005 20041203123807 008 041203 n azknn|abn |a a|a | 150 ▼a부마 항쟁[釜馬抗爭]▲ 450 ▼a부마 사태[釜馬事態]▲ 450 ▼wr▼i영어▼ademonstration for democracy in Busan and Masan▲ 550 ▼wg▼a민중 봉기[民衆蜂起]▲ 550 ▼wg▼a한국 민주화 운동[韓國民主化運動]▲ 550 ▼a10.26 사태[十二六事態]▲ 680 ▼i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지역에서 일어난 반정부 민중항쟁. 박정희(朴正熙) 정부의 유신체제는 정치적·사회적 갈등을 빚어오다가 7년째에 접어드는 79년에 그 한계점에 이르렀다. <백두진(白斗鎭) 파동>과 박대통령 취임반대운동으로 시작된 79년은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연행·체포·고문·연금 등 강압책이 잇따른 가운데서도 야당과 재야세력의 저항이 어느 때보다도 고조되어 정국은 긴장을 더해갔다. <크리스찬아카데미사건> <오원춘사건(吳元春事件)>에 이어 <YH여공농성사건>이 일어났고, 김영삼(金泳三) 신민당총재에 대한 총재직정지가처분과 의원직 박탈로 정국은 파국상을 나타냈다. 부마사태는 부산대학교 약 500명 학생들의 반정부시위로 시작되었다. <민주구국투쟁선언문>이 낭독되고 <민주선언문>이라는 유인물이 뿌려졌으며, 이때 학생수는 점차 불어나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이들은 동아대학교학생들과 합류, 부산시내 중심가로 진출하였으며 이튿날의 시위는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한 가운데 이미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어가고 있었다. 18일에는 마산 경남대학 학생들이 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 일부 시민들이 가담한 가운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19일에는 더욱 치열해져 마산시내는 한때 무정부상태가 되었으며, 이날 시위의 특징은 공장직공·점원·날품팔이 등으로 보이는 10∼20대의 젊은이들이 가담하여 시위의 앞장에 선 사실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정부는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부산지구계엄사령부는 18일 0시를 기해 포고문 제 1 호를 발포, 각 대학의 당분간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의 2시간 연장 등 8개항을 포고하였다. 정부는 20일 정오를 기해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하였다. 계엄령이 선포된 부산지역에는 공수부대가 동원되어 시위하는 시민과 학생에 대한 강도높은 진압이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부마사태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단시간에 진압되었는데, 그 뒤 곧 유신체제는 붕괴되었다. ▲